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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육사44 |
갑오개혁기 정부의 교육정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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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학교에 대한 관리
1) 법령상에는 규제와 감독 명시 : 법령에는 모든 학교는 정부나 지방관의 설치인가를 받아야 할뿐만 아니라 교과서 채택이나 수업시수, 교원의 임용에 이르기까지 학부나 해당 관찰사의 인가나 감독을 받도록 규정하고 있다.
2) 실제는 자율적 운영 : 그러나 실제로 이 법령에 의거 각종 학교를 규제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학부 참사관이 관립학교 교장을 겸임하도록 되어 있었는데, 이 때문에 해당 학교 교사들은 보다 자율적으로 수업을 할 수 있었다.
2. 사립학교정책
1) 정부는 사립학교의 설립과 운영에 대해서도 적극 지원하였다.
2) 많은 사립학교들이 정부관청이나 향교 등 공공건물을 빌려 설립되었으며, 각 지방관은 학교설립에 개인 출연금이나 공공예산을 지원하였다.
3) 정부는 사립학교에 서책을 지급하거나 학교 이전 및 개축 경비를 지원하는 등, 개화기의 학교에 있어서 공립과 사립의 차이는 그리 크지 않았다.
3. 학사운영
1) 교원 : 대부분 양반 출신이었다.
2) 공립소학교 부교원 : 근대교육에 대한 유림의 반대를 무마하기 위해 현지 유림의 천거에 의해 학부가 임명했다.
3) 승급제 : 학사운영은 요즈음과 같은 학년제가 아니라 승급제로 이루어졌다.
4) 복식학급 : 당시의 수업은 여러 학년의 학생들을 동시에 가르치는 복식수업이었다. 따라서 학생들은 교사의 일제식 수업과 함께, 개별적으로 자신들의 진도에 맞는 교재로 공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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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육사45 |
갑오교육개혁에 대한 평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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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갑오교육개혁 실패의 교육내적 원인
1) 불분명한 교육개혁 이념
① 갑오개혁 이후 정부는 동도서기(東道西器)적인 입장에서 우리의 정신문화는 보존하고 앞선 서양의 과학기술을 받아들이는 교육개혁을 추진했다.
② 그러나, 기존의 전통적 교육기관은 그대로 두고 동도서기를 표방하는 별도의 관공립학교를 다양하게 설립하여 신구 교육기관간의 갈등을 초래했다.
2) 교육의 출세 수단화 : 이와 같은 교육이념의 부재 속에 관공립학교 학생들은 학교를 출세의 수단으로만 인식하였으며, 학교에서 배운 약간의 서양 지식을 보물인양 여기는 ‘개화의 병신’이 되어 버렸다.
2. 갑오교육개혁기의 교육사적 의의
1) 자율과 지원 중심의 교육행정 : 일제에 의해 왜곡되기 이전의 교육행정은 통제중심의 중앙집권적인 교육행정이 아니라 자율과 지원 중심의 교육행정이었다.
2) 능력별 학급편성과 개별화된 수업 : 근대적 관공립학교는 획일적 학급편성과 일제식 수업이 아니라 능력별 학급편성과 개별화된 수업방식을 실시하고 있었다.
3) 지역 공동체에 의한 사학의 설립과 운영 : 사기업과 같은 사립학교의 운영이 아니라 지역공동체 모두에 의한 사립학교의 설립과 운영이 우리 본연의 건학정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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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육사46 |
개화기(1894~1910)의 민족교육운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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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화기 민족교육운동의 방향
1) 국권회복 : 민족교육운동은 투쟁 목표와 방법에 있어서 서로 차이를 보였으나 모두 국권 회복을 목표로 하는 데에는 일치하였다.
2) 반봉건과 반외세 지향
① 반봉건 : 반봉건은 봉건제도를 타파하고 근대적 사회를 이룩하는 것이고,
② 반외세 : 반외세는 서구의 문물을 배우되 자주적인 근대화를 단행하고 근대교육을 통하여 민족적 역량을 배양함으로써 국권회복을 달성하자는 것이었다.
2. 민족교육운동 세력의 유형
1) 반봉건 및 반외세 지향 세력
① 서구의 문물 뿐 아니라 서구식 민주주의를 지향한 개화사상가들은 반외세 뿐 아니라 봉건제도를 타파하기 위한 반봉건 운동도 함께 전개했다.
② 이 시기에 반봉건과 반외세를 동시에 주장한 대표적인 단체는 신민회와 배재학당의 학생들을 중심으로 발족한 학생단체인 협성회였다.
③ 협성회는 국권회복과 개화사상에 기초하여 입헌적 민주국가의 수립을 지향했다.
2) 반외세 지향세력
① 대신, 관찰사, 군수, 교원, 무관 등 유교적인 식자층은 반외세 운동을 주도하면서도 기존의 봉건제도를 타파하는 반봉건 운동을 지향하지는 않았다.
② 이들의 민족교육운동은 민족 사학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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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육사48 |
개화기의 민족사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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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민족사학의 성격
1) 개화사상과 민족주의적 성격 : 민간사학은 처음에는 선진 여러 나라의 문물을 받아들이려는 개화사상에서 출발했으나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되면서 민족주의적 성격을 띠어 갔다.
2) 독립운동 : 민간사학은 을사보호조약(1905)이후 독립운동의 성격을 띠어 갔는데, . 특히 을사보호조약 이후의 민족교육운동을 교육구국운동이라고 한다.
3) 실학사상의 승계 : 구한말 민간사학의 개화사상은 실학사상의 근대지향적 측면을 계승하여 점차 근대적 변혁사상으로 발전해 갔다.
4) 설립이념 : 이런 취지로 설립된 민족사학은 개화를 통한 근대화의 지향, 민족의식의 고취, 교육을 통한 국권의 회복 등을 목적으로 했다.
5) 중등학교 중심 : 교육을 통한 국권회복을 내세운 민족사학은 대부분 중등학교였다.
2. 원산학사(1883)
1) 원산학사의 설립(1883) : 강화도 조약에 의해 개항하게 된 원산의 주민들은 일본상인의 침투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신교육이 필요함을 절감하고, 개화파 관료였던 덕원부사 정현석과 협력하여 근대학교인 원산학교를 설립한다.
2) 원산학사의 성격
① 외세에 대응하기 위해 우리나라 사람들의 자력으로 세운 최초의 근대학교이다.
② 외국의 신식학교를 모방한 것이 아니라 서당을 개량한 것이다.
3. 민족사학의 전개
1) 흥화학교(1895): 특명전권대사로 구미 여러 나라를 순방하고 돌아온 민영환은 흥화학교를 세워 영어와 일어, 측량술 등을 가르쳤다.
2) 점진학교(1899): 도산 안창호가 그의 고향인 강서지방에 세운 소학교로 최초로 남녀공학을 실시했다.
3) 보성전문학교(1905): 대한제국의 내장원경이었던 이용익이 교육구국의 이념아래 설립한 최초의 사립전문학교이다. 이용익은 이어서 1906년 보성중학교를 설립하였다.
4) 엄주익의 양정의숙(1905), 민영휘의 휘문의숙(1906), 이승훈의 오산학교(1907), 안창호의 대성학교(1908) 등의 많은 민족사학이 설립되어 1908년에는 그 수가 5,000여개에 이를 정도였다.
5) 일제의 탄압 : 그리하여 일본인에 의해 조종되던 통감부는 ‘사립학교령(1908)’을 공포하여 민족사학을 탄압하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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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육사49 |
교육구국운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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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교육구국운동의 의미
1) 교육구국운동이란 을사보호조약(1905)이후 합방(1910)에 이르기까지 전개된 운동이다.
2) 이는 동도서기론에 사상적 뿌리를 두고 있는 근대적 지식인이 중심이 되어 애국심 함양과 서양의 근대지식을 보급하고자 하는 운동으로 그 핵심은 사립학교였다.
3) 이 시기는 애국계몽운동기라고도 불리는데, 교육이 우리 민족의 독립을 이루게 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으로 인식되어, 전국에 걸쳐 5,000여 개의 사립학교가 설립되었다.
2. 사립학교 설립운동의 주도 세력
1) 애국지사들
① 이 운동의 전개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 사람들은 교육구국운동을 지도하고 사재를 투입하여 학교를 설립한 애국지사들이었다.
② 예컨데 이동휘같은 인물은 군대 해산 후 2-3년 동안 함경도 일대를 순회하면서 총 100여 개의 사립학교를 설립하는 데 공헌하였다.
2) 일반민중들
① 사립학교 설립운동에 도화선을 제공한 것은 애국지사들이지만 실제로 사립학교의 설립과 운영에 힘을 쏟았던 사람들은 농민, 노동자, 어민, 상공업자, 하급관리 등 일반 민중들이었다.
② 사립학교 설립운동은 일부 도시에 국한되지 않고 전국 각지의 농촌에도 깊숙히 침투하여 일반농민들도 학교 설립에 참여하고 그 자제들을 학교에 입학시켰다.
③ 1908년 1월 만경대의 남리마을 농민들은 6년제의 사립순화학교를 세웠으며, 이듬해 1월에는 갑산군의 광산 노동자들이 사립보명학교를, 그리고 북청군 괴정리 농민들은 북청제1사립학교를 설립하였다.
3) 교원 : 교육구국운동 초기에 설립된 사립학교의 교사는 주로 서울에 있는 중학교 졸업생 혹은 재학생들이었는데, 이들은 아무런 보수가 없어도 시골에 설립된 사립소학교 교사로 부임하였다.
3. 학회의 교육구국운동
1) 애국운동단체의 교육운동 : 이 시기에 조직된 대한협회, 서우학회, 한북흥학회, 서북학회, 흥사단, 기호흥학회 등 50여 개의 애국운동단체들은 그 하부기구로 교육부를 두고 적극적으로 교육운동을 전개해 갔다.
2) 교육운동의 방향
① 사립학교의 설립과 지원 : 하부기구로 교육부를 두고 있던 이 단체들은 사립학교를 설립하거나 재정적으로 어려운 사립학교에 재정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② 교원의 양성 : 이들 학회에서 가장 심혈을 기울인 것은 당시 대대적으로 설립된 사립학교에 교원을 양성하여 보급하는 일이었다.
③ 교과서의 편찬 : 장지연, 박은식, 신채호, 최광옥 등 애국적 지식인들은 『유년필독』, 『대한지지』, 『초등소학』, 『동국사략』, 『만국사기』, 『국문독본』 등 사립학교에서 사용할 교과서를 편찬하였다.
④ 사립여학교의 설립 : 학회에서는 사립여학교의 설립에도 적극적으로 나서 1906년 양규의숙을 세운 후, 1908년 전국적으로 사립여학교가 48교에 이르렀다.
4. 교육구국운동의 교육내용
1) 민족 사학의 교육목적 : 교육구국운동기에 설립된 민족사학에서는 충국애국을 위한 정신교육과 신학문 교수라는 두 가지에 초점을 두었다.
2) 교육내용 : 충군애국하는 정신을 위해 각 사립학교에서는 조선어, 조선역사, 조선지리 등 우리 나라의 언어, 역사, 문화, 지리 등을 중점적으로 가르쳤다.
3) 창가 교육 : 이외에도 수업시간 틈틈히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창가를 가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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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육사50 |
근대의 교육사상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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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남궁억(1863~1939)
1) 교육목적 : 애국애족하는 사회인, 성실한 도덕인, 생산 실천하는 산업인의 육성을 교육의 목적으로 삼았다.
2) 교육 내용 : 역사교육, 예능교육, 실업교육, 언어교육 등을 중시했다.
3) 민족의식 고취 노력 : 역사교육을 강조하여 「동사략」,「조선이야기」등을 저술하여 가르쳤으며, 무궁화 선양 사업을 전개했다.
4) 노작교육을 통한 실업 교육 : 실업교육을 위해 학생들과 함께 풀베기, 나무하기, 꽃가꾸기, 자리짜기 등을 했다.
5) 저서 : 조선이야기」,「동사략」,「조선어법」
2. 이승훈(1864~1930)
1) 교육의 목적 : 성(誠), 애(愛), 경(敬)을 실천하는 애국인의 육성을 교육의 목적으로 삼았다.
2) 오산학교(1907) 설립 : 민족의 지도자 양성을 위해 오산학교를 설립했다.
3. 안창호(1878~1938)
1) 교육이념 : 교육이념으로 자아혁신, 무실역행, 점진공부를 내세웠으며, 자아혁신을 통해 인격혁명을 이루고 인격혁명을 통해 자주독립을 이루고자 하였다.
2) 교육목적 : 교육목적으로 건전한 인격의 실현을 내세웠는데, 이는 현대교육의 전인교육과 일치하는 것이다.
3) 교육 내용
① 지육보다 체육을 중시하여 건전한 신체를 갖출 수 있는 내용을 중시했다.
② 일인일기(一人一技)를 실천할 수 있는 실업교육을 강조했다.
4) 교육방법 : 교육방법으로는 성실성과 점진성을 강조했다.
5) 4대 정신 : 건전한 인격을 형성하기 위해 갖추어야 하는 4대 정신으로, 무실, 역행, 충의, 용감을 내세웠다.
6) 흥사단 운동 : 무실역행주의에 입각한 방법으로, 지덕체의 3육을 동맹 수련하여 건전한 인격을 육성하고, 신성한 단결을 조성하여 민족대업을 이루는데 흥사단의 목적을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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