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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육사51 |
일제하 교육의 전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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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 1차 조선교육령 시행기(1910.8 - 1922. 2)
1) 교육목적
① 충량한 국민을 만드는 것을 교육목적으로 하고, 시세와 민도에 맞는 교육을 한다는 것이 이 시기에 내세운 교육의 방침이다.
② 이는 한민족을 일본의 식민지 정책에 잘 순응하는 일본 천황의 충성스러운 신민으로 만들고, 저급 수준의 생산노동자를 양성하기 위해 고등교육은 억제하고 저급의 실업교육을 실시하겠다는 의도이다.
2) 교육연한의 단축
① 보통학교-6년에서 4년으로, 고등보통학교-7년에서 3~4년으로, 상공학교-4년에서 2년으로, 외국어 학교-5년에서 3년으로
② 이는 일본의 학교보다 수업연한이 1-2년 정도 짧은 것이다.
3) 한성사범학교의 폐지
① 한성사범학교를 폐지하고 관립 고등보통학교에 1년 과정의 사범과와 1년 이내의 교원속성과를 두었다.
② 이는 식민지교육을 강화하기 위하여 일본인 교원으로 대치하기 위한 속셈에서 비롯된 것이다.
4) 교육과정
① 일본어를 강화하고, 수신교과를 중시했으며, 박물, 물리, 화학을 이과로 통합하고, 실업과 법제와 경제를 실업으로 통합했다.
② 영어를 선택으로 하여 상급학교에의 진학을 장려하지 않았다.
5) 외국어학교와 성균관의 폐지
① 외국어학교를 폐지하여 한민족의 해외 진출과 교류를 억제했으며,
② 성균관을 폐지하여 경학원으로 대치하고, 서당을 통제함으로써 전통교육을 말살하려 했다.
6) 사립학교규칙(1908)
① 사립학교규칙을 통하여 학교의 설립 폐쇄 및 학교장과 교원의 채용을 총독부의 인가를 받도록 했다.
② 또한 각급 학교의 수업연한, 교과목, 주당 수업시간 수, 학생정원 등은 총독의 인가를 받도록 하여 교육을 직접 통제했다.
7) 교과서검정(1907)
① 교과서는 총독부의 편찬 혹은 검정을 거친 것이어야 했다.
② 따라서 한국인 저작의 각 학교용 교과서를 몰수했다.
2. 제 2차 조선교육령 시행기(1922.2 - 1938.3)
1) 수업연한의 연장
① 수업연한을 보통학교는 4년에서 6년으로, 고등보통학교는 4년에서 5년으로 연장하였다.
② 그리고 한국민에게도 형식적으로나마 상급학교 진학의 길을 열어 주었다.
2) 교과
① 각급 학교에서 조선어를 필수과목으로 부과하였다.
② 이과를 물리, 화학, 박물 등으로 세분화하고, 실업과목도 실업, 법제 및 경제로 나누었다.
3) 사범학교
① 사범교육은 독립된 사범학교에서 실시하도록 하고, 수업 연한은 남자사범 6년, 여자사범 5년으로 했다.
② 이를 다시 보통과 각각 5년과 4년, 연습과 1년으로 하였다.
4) 대학교육에 관한 조항
① 대학교육 및 그 예비교육에 대한 조항이 신설되었다.
② 수업연한은 예과 2년, 본과 3-4년으로 하고, 일본인과 한국인이 공학하도록 하였다.
5) 복선제의 도입
① 교육령 제2조와 제3조에는 한국 내에 있는 일본인을 위한 교육제도와 한국인을 위한 교육제도를 따로 마련하는 이른바 복선제를 도입했다.
② 전자는 일본어를 상용하는 자를 위한 교육제도라 하고, 후자는 일본어를 상용하지 않는 자를 위한 교육제도라 하였다.
3. 제 3차 조선교육령 시행기(1938.3 - 1943.3)
1) 학교명칭의 변경 : 보통학교, 고등보통학교, 여자 고등보통학교의 명칭을 소학교, 중학교, 고등여학교로 변경했다.
2) 사범학교의 통합 : 종래의 소학교 교원 양성기관과 보통학교 교원 양성기관이 분립되어 있던 것을 하나로 통합한다.
3) 조선어교육의 억제 : 조선어는 정규과목에서 수의과(선택과목)으로 밀려났으며, 개설하지 못하도록 압력을 넣었다.
4) 교육내용 : 수신과에서는 3대 강령을 주입시키고 실천하도록 하고, 일본어를 가장 중요한 과목으로 강조했다.
4. 제 4차 조선교육령 시행기(1943.3 - 1945.8)
1) 1941년 국민학교령을 발표하여 소학교를 국민학교로 개칭하였다.
2) 1943.3 발표한 제 4차 조선교육령은 교육목표를 한국민의 황국신민화에 두었다.
5. 일제하 교육의 폐해
1) 도구주의적 교육관 : 교육이 일본의 식민정책과 팽창주의를 실현키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어, 다른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도구로 전락했다.
2) 교육행정조직의 관료화 : 식민정책의 실현을 위해 교육의 통제가 요구되어 교육행정조직이 관료화되었다.
3) 전체주의적 훈육 : 대동아 건설을 위하여 한국을 일본의 병참기지로 만들면서 학교를 병영화 했다.
<일제의 교육탄압>
1906 |
사범학교령 |
․교사 양성 법규의 일본식 개정 ․사립사범학교 불허 |
1908 |
사립학교령 |
․민족사학의 탄압을 목적으로 제정 ․모든 사립학교가 정부의 인가를 받도록 함 |
1908 |
교과용 도서 검정 규정 |
․교과서의 국정 교과서화로 교육내용을 통제 |
1911 |
제1차 조선교육령 |
․한국민의 신민화와 우민화를 위해 고등교육은 억제하고 저급의 실업교육 강화 ․교육연한의 단축 - 보통학교 : 4년, 실업학교 : 2-3년, 전문학교 : 3-4년 ․일본어 교육강화, 외국어 교육폐지 |
1913 |
사설학습 강습회 규칙 |
․야학, 학술강습회 등의 소규모 민족교육탄압을 위해 제정 |
1918 |
서당 규칙 |
․근대학교로 발전해 가는 「개량서당」탄압 |
1922 |
제2차 조선교육령 |
․한국민 무마책으로 제정 ․보통학교 수업연한 확대(4년 → 6년) ․한국민의 대학 입학 허용 ․복선제의 도입 |
1938 |
제3차 조선교육령 |
․한민족을 황국의 신민으로 예속하려는 민족 말살정책의 일환 ․한국어 교육금지 ․신사참배 강요 ․한국인 교사를 일본인 교사로 대치 ․보통학교를 소학교로, 고등보통학교를 중학교로 명칭변경 |
1941 |
국민학교령 |
․군국주의적 야욕에서 실시 ․소학교를 국민학교로 개칭 |
1943 |
제4차 조선교육령 |
․학교를 전시 동원체제로 전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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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육사52 |
일제의 우민화 교육정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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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학교명칭의 변경
1) 일제는 소학교를 보통학교로, 중학교를 고등보통학교로 그 명칭을 바꾸었다.
2) 이는 보통학교 또는 고등보통학교 이상의 교육이 없다는 것을 내보이기 위한 것으로, 우리 교육을 저급화하기 위한 의도에서 시행한 것이다.
2. 수업연한의 단축
1) 일제는 1906년 ‘보통학교령’을 공포하여, 갑오개혁으로 설립된 소학교의 명칭을 보통학교로 바꾸고 수학연한도 6년에서 4년으로 단축했다.
2) 또 중학교는 고등학교(고등보통학교)로 개칭하고 7년의 수업연한을 3~4년으로 단축하였다. 뿐만 아니라 기존의 4년제 상공학교도 2년으로 단축했다.
3. 복선제의 도입
1) 일제는 1922년 조선교육령을 개정하여 소학교와 보통학교를 병행하는 복선제를 도입했다.
2) 소학교에는 ‘국어를 상용하는 자’, 즉 일본인이 다닐 수 있게 하고, 보통학교에는 ‘국어를 상용하지 않는 자’, 즉 한국인을 다니게 하는 복선제를 실시함으로써 조선에 있는 일본인과 한국인의 차별교육을 실시하고자 한 것이다.
4. 직업과 교과의 도입
1) 일제는 기존의 교육을 ‘독서교육’이라고 비판하고, 1929년 보통학교 교육과정을 개정하여 ‘직업과’교과를 도입했다.
2) 이의 도입으로 보통학교 교육과정은 풀베기, 가축돌보기, 실습지 청소, 판매 등의 노력봉사로 상당부분 채워져 학교수업이 빈약하기 그지없게 되었다.
5. 교육여건악화 및 수업료 징수
1) 1906년의 보통학교령에서는 학급당 정원을 40명에서 60명으로 확대하였다.
2) 그리고 그 동안 무상이었던 수업료를 징수하여 가난한 사람들의 취학기회를 억제하기도 하였다.
6. 외국어학교와 성균관의 폐지
1) 일제는 외국어학교를 폐지하여 한민족의 해외진출과 교류를 억제하고자 하였다.
2) 또한 성균관을 폐지하여 경학원으로 대치하여 전통교육을 말살하려 했다.
7. 실업기능교육의 실시
1) 일제는 한국민을 우민화하여 그들의 부림을 잘 받는 하급관리, 사무원, 근로자 등의 양성을 목적으로 하였다.
2) 이러한 의도는 보통학교의 목적을 “실용에 맞는 인물을 만드는 데에 있다.”고 한 데라우치 총독의 훈시에서도 드러난다.
3) 그래서 조선에는 대학을 설치하지 않고, 필요하면 실업기능교육만을 시키려 했다.
8. 국민학교령(1941)
1) 일제는 ‘소학교’라고 부르던 초등교육기관을 1941년 ‘국민학교’로 개칭한다.
2) 이는 단순한 명칭의 변경이 아니라 초등학교를 군국주의의 연병장으로 만들기 위한 일제의 군국주의적 야욕에서 비롯된 것이다.
9. 간이학교제의 도입
1) 1920년대 이후 한국인의 교육열 증가로 보통학교 증설 운동을 전개하자 일제는 ‘간이학교’로 대응하였다.
2) 간이학교는 수업 연한 2년에 80명 정도의 1개 학급만을 설치할 수 있는 학교로, 보통학교에 연결되는 기관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완전한 종결교육기관이었다.
3) 교과시수의 1/3이 직업훈련이었으며 교육시설이나 교재도 제대로 갖추어지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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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육사53 |
일제하 민족교육운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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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선민립대학설립운동
1) 3.1운동후 민족교육에 대한 열의가 고조되자 1920년 6월 한규설, 이상재 등은 재단법인 조선교육회를 결성하고 민립 종합대학을 설립하기로 결의하였다.
2) 각계 인사들이 조선민립대학 기성회를 결성하고 민립대학 설립운동을 본격화했으나, 일제의 방해공작과 기금 모금 부진 등의 이유로 인해 실패로 돌아갔다.
3) 일제는 이를 무마하기 위해 1925년 5월에 경성제국대학 관제를 공포하여 국립대학을 설립했다.
2. 문자보급 운동과 문맹퇴치 운동
1) 1920년 후반부터 일제는 우리 민족의 문화를 말살시키려는 정책을 감행하기 시작하였다.
2) 이러한 일제의 문화탄압정책에 반발한 민족운동가들은 민족문화를 보존, 발전시킬 수 있는 길은 계몽운동을 통해 민족의 실력을 기르는 길이라는 인식 하에 문자보급을 통한 계몽운동에 뛰어 들었다.
3) 이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조선일보사와 동아일보사가 주도한 브나로드 운동이다.
4) 1928년 동아일보는 창간 8주넌 기념행사를 핑계로 문맹퇴치운동을 전국 각지에 벌이려 했으나 조선총독부의 방해로 실패했다.
5) 그러나 다음해 여름 방학부터 조선일보사에서 귀향 학생들을 통한 문자보급운동을 전개하여 크게 성공을 거두자, 동아일보는 ‘브나로드’라는 슬로건을 걸고 여름방학에 귀향하는 학생들을 동원하여 각 지방에 한글과 산수를 가르치고, 학술강연, 시국강연, 위생강연 등을 실시했다.
3. 야학을 통한 민족교육운동
1) 3.1운동 이후 우리 국민의 정치적 각성이 고조되면서 노동자 농민을 대상으로 하는 야학이 급속하게 일어났다.
2) 노농야학에서는 농민과 노동자와 도시 빈민의 자제들 중 공립보통학교에 가지 못한 학령아동을 대상으로 조선어, 한문, 산술 등의 기본 과목과 농업, 양잠, 노동독본 등 실용적인 과목을 가르쳤다.
3) 뿐만 아니라 시사, 토론, 조선역사, 지리, 창가 등의 과목을 통해 민족 자주의식과 반일의식을 고취하였다.
4) 이러한 노농야학은 1930년 이후 일제의 집중적인 탄압의 대상이 되어 대부분 폐쇄되고 교사들도 체포됨으로써 지하로 숨어들게 되었다.
4. 서당의 민족교육운동
1) 서당교육의 주체세력은 민죽주의자들과 개화기의 의병투쟁에 참가했던 양반, 유생들이었다.
2) 이들은 단순한 지식교육을 넘어서 민중을 교화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였으며, 문맹퇴치운동 또한 실시하였다.
5. 신간회의 민족교육운동
- 신간회는 비타협적인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이 주체적으로 연합하여 절대독립을 위한 투쟁을 전개한 민족적 결사운동 단체였다.
1) 일제식민지교육에 대한 저항 : 비정규적 교육형태인 사회교육적 활동을 전개한 신간회는 식민지 교육의 철폐를 위해 조선인 위주의 교육, 관공립, 사립학교에 대한 경찰 간섭의 배제, 조선인 아동의 의무교육제 실시, 야학허가, 간이문고의 설치 등을 요구했다.
2) 민족해방을 위한 의식화 교육 : 신간회는 지방강연회, 노동자, 농민, 학생들의 비밀결사조직, 사회과학 연구의 보급, 야학의 설치 등을 통해 민중들이 처한 상황을 인식시키고, 그들로 하여금 직접 식민지 투쟁에 참가하도록 하였다.
3) 문자보급운동 : 신간회는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으로 인한 문화적 단절을 극복하기 위해, 조선어학회와 함께 문자보급운동을 전개하였다.
6. 국외의 민족교육운동
1) 간도 지역의 민족교육운동
① 서전서숙(1906) : 고종의 밀사였던 이상설이 설립한 학교로 신학문을 통한 철저한 반일 민족교육을 지향했다.
② 명동서숙(1908) : 명동서숙은 1909년 명동학교로 개편되었으며, 1910년 중학교를 병설하여 간도지역의 대표적인 민족교육기관으로 성장하였다.
③ 신흥무관학교(1910) : 비밀결사인 ‘신민회’의 이동녕, 이시영 등이 설립한 신흥강습소가 발전한 것으로 무관양성교육을 했다.
④ 명동학교 이후 많은 학교가 설립되어 1916년 일제의 조사에 따르면 161개 학교에, 학생 수는 4,094명에 이르렀다.
2) 연해주 지역의 민족교육운동
① 계동학교(1907) : 블라디보스톡의 신한촌에 설립된 학교로 7-8세에서 12-13세 사이의 학생을 대상으로 한문, 한글, 습자, 산술, 수신, 체조, 한국지리 등을 가르쳤다.
② 1925년 연해주 교육부의 조사에 의하면, 학교 수 180여 개에 학생 수는 8,000명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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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육사54 |
미군정하 교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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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미군정기 교육의 전개
1) 미군정은 오천석의 추천으로 유억겸, 김성수 등으로 한국교육위원회를 조직했다.
2) 한국교육위원회는 교육문제 전반에 대한 심의와 결정을 하였고, 각 도의 교육행정 책임자의 인사문제도 다루었다.
3) 1945년 11월 23일 군정청 학무국 산하에 조선교육심의회를 구성하여 해방 후 한국교육의 정초를 다지는 작업을 하였다.
2. 미군정의 교육방침
- 한국교육위원회의 심의를 거친 미군정청은 1945년 9월 22일 당면한 교육 방침을 결정하였다.
1) 일반방침
① 교육제도의 법규는 금후 실시해 나갈 교육정신에 저촉되지 않는 한 당분간 현실대로 하되, 일본주의적 색체에 관한 일체의 사항을 말살함
② 평화와 질서를 당면의 교육목표로 함
2) 교육상 유의할 점
① 투쟁과 혼란을 지양하고 평화와 질서유지에 유의한다.
② 공론(公論)에 의하여 정당한 민의를 발양하는 공민적 자질을 적극적으로 연성한다.
③ 교육을 실천적으로 하여 공리공론에 떨어지지 않게 한다.
④ 예능을 중시하여 온아한 품성을 도야 한다.
⑤ 체육을 적극적으로 장려하여 강건한 기우를 함양한다.
⑥ 사대주의와 당쟁에 빠지지 않도록 한다.
3. 미군정의 교육개혁
1) 학제 개혁
① 일제의 복선형 학제를 단선형으로 개편했다.
② 학교계통을 학령전 교육, 초등교육, 중등교육, 고등교육, 특수교육의 5종으로 한다.
③ 교육연한: 6-3-3-4제에 따른 16년과 유치원 교육 및 대학원 각 2년을 합하여 총 20년
④ 중등교육을 초급과 고급으로 2분한다.
⑤ 전문학교제도를 순차로 폐지하고 이를 대학에 흡수시킨다.
⑥ 1년을 2학기로 하고 1학기를 9월부터 2월까지, 2학기를 3월부터 8월까지로 한다.
⑦ 남녀공학을 원칙으로 한다.
2) 교육과정 및 교과서 정책
① 국어 및 국사 교육의 강화: 일본식 교육으로부터의 탈피를 위한 국어 및 국사 교육의 강화가 현저하게 두드러졌다.
② 교과서에는 상용한자를 1,000자로 제한하고 한글 전용과 가로쓰기를 원칙으로 채택한다.
3) 교사양성
① 절대 부족인 교사 양성을 위해 각 사범학교에 강습과 혹은 임시 초등교사 양성과를 부설하며, 군정 첫 해에 5개, 이듬해에 4개의 사범학교를 증설했다.
② 중등교사 양성을 위하여 경성사범학교와 경성여자사범학교를 합하여 경성사범대학으로, 대구사범학교를 대구사범대학으로 승격했다.
4) 문맹퇴치
① 군정 초기의 교육적 당면과제의 하나는 77%에 달하는 문맹자를 해소하는 것이었다.
② 이를 위하여 학무국에 성인교육과를 개설하고 전국적으로 국문 강습회 운동을 벌였다.
③ 한편 공민학교를 설치하여 학령을 초과한 아동을 수용하녀 기초교육을 실시하도록 하였다.
5) 의무교육의 실시
① 신교육제도의 도입 과정에서 가장 중점적인 노력이 기울여진 분야는 초등교육이었다.
② 초등단계의 전 학령아동을 취학시킬 계획으로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재정적인 어려움과 교사의 부족 등으로 인해 의무교육의 완전 실시는 이루지 못했다.
4. 미군정기 교육의 평가
1) 긍정적 측면
① 차별교육에서의 탈피: 미군정하에서 우리 교육은 제도적으로 과거 일제하에서의 차별교육, 불평등 교육으로부터 벗어나 발전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할 수 있었다.
② 국가 발전의 여건 조성: 특히 교육 수혜자의 확대를 위한 많은 과감한 정책들은 비록 지나친 교육열에 따른 부작용을 수반하기는 했으나 국가 발전을 위한 여건 조성에 기여하였음은 분명하다.
2) 부정적 측면
① 교육여건을 고려하지 않은 교육 인구의 지나친 팽창
② 획일적 교육 제도의 채택에 따른 교육부문에서의 다양성 상실
③ 위로부터의 교육 개혁으로 인한 교육 부문의 관료적 통제의 만연
④ 외세 의존적 교육 엘리트 집단의 온존에 따른 교육 민주화의 지연
⑤ 교육내용의 서구문화중심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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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육사55 |
미군정하 교육운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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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새 교육운동
1) 성격 : 새 교육운동이란 오천석이 주도가 되어 진행된 것으로, 민주주의 교육이념과 미국식 진보주의 교육방법을 도입하고자 한 교육운동이다.
2) 새 교육운동의 지향점
① 전통적 교육의 계급주의․차별주의를 배격한다.
② 인간을 도구화하는 교육을 배격하고, 사람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교육을 지향한다.
③ 억압과 복종의 교육이 아니라 자유인의 교육이 되어야 한다.
④ 획일주의 교육을 거부하고, 개인차와 개성을 존중하는 교육을 지향한다.
⑤ 과거의 문화유산을 전달하는 지식중심․서적중심의 교육을 배격하고, 생활중심의 교육을 지향한다.
3) 새교육운동의 교육방법
① 교사중심 교육방법 → 아동중심 지도방법
② 주입식 교육 → 자발적 교육
③ 일률적 교육 → 개성 적응의 교육
④ 교과서 지상 → 경험 중심
⑤ 기억본위의 지도 → 생활본위의 지도
2. 진보적 민주주의 교육운동
1) 성격 : 좌파에서 전개한 교육운동으로, 적극적으로 미군정에 반대하며 국민의 의식화교육을 실천하고자 했다.
2) 교육운동의 지향점
① 학제: 5-4-4제의 복선형 학제를 내세웠다.
② 교육과 정치를 연결을 주장하였으며, 정치․노동․과학교육이 교육의 주된 내용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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