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시. 정의 패러다임-응보적 정의

 

1. 정의란 무엇인가?

사전적 의미 사회나 공동체를 위한 옳고 바른 도리

굽은 것을 곧게 하는 것, 옳고 그른 것을 판별하여 옳게 하는 것

정의라는 단어, 그리고 그 의미가 가장 많이 표현되는 곳은 어디인가?

가정과 학교라는 생활공간.

가정과 학교생활을 어떻게 통과했는가는 정의를 어떻게 배웠는가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2. 정의 개념을 설명하고 있는 표상: 정의의 여신상 디케

정의의 개념에 가장 가까운 여신은 그리스의 디케(Dike). 로마 신화를 통해 정의의 디케에 형평성의 개념이 추가되면서 오늘날의 정의의 여신 유스티치아(Justitia)가 탄생하였고, '정의(Justice)'란 단어가 생겨났습니다.

(1) 서양의 정의의 여신상칼은 법을 위반한 경우 엄격하게 처벌하겠다는 강제성을, 저울은 개인 간의 권리에 대한 다툼을 공평하게 저울질하겠다는 형평성을, 두 눈을 가리는 것은 사적인 감정이나 편견을 갖지 않고 판결을 내리겠다는 공정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2) 우리나라의 정의의 여신상서양의 정의의 여신상과는 달리 칼 대신 법전을 들고 있으며, 두 눈을 뜨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법전을 들고 있는 것은 법의 권위를 상징하며, 눈을 뜨고 있는 이유는 사회적 약자를 적극적으로 돕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것입니다.

 

3. 정의: 피해자의 고통의 무게와 가해자의 처벌의 무게의 균형을 맞추는 것

 

 

 

 

 

정의의 여신상이 표방하는 정의 방식: 응보적 정의

 

4. 응보적 정의의 정의

잘못된 행동이 있을 때 그에 상응하는 고통을 처벌로 부여하는 것으로 사회를 통제하고 사람의 형동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패러다임

 

5. 응보적 정의의 원리

 

 

6. 응보적 정의의 한계점

처벌중심, 가해자에 초점, 피해자 소외

원칙과 법 적용 중요, 당사자의 필요 외면

대결구도, 제삼자 주도, 고비용 발생

과도한 사건 처리

관계의 단절, 공동체의 파괴

교정시설의 문제점, 낙인 현상

 

응보적 정의가 낳은 비극

-30년간 억울하게 옥살이를 했던 글렌 포드 이야기

 

미국에서 있었던 일이다. 1983115일 루이지애나 주 슈리브포트에서 살인 사건이 발생했다. 보석상 주인이 무장강도가 쏜 총에 맞아 숨지는 사건이었다. 경찰은 4명의 용의자를 체포했고 그 중 한명이 파트타임 정원사로 일하던 당시 34세의 글렌 포드였다. 당시 글렌 포드의 유죄를 입증할 물증도 범행 무기도 발견되지 않았다. 다만, 그에게는 정황 증거가 불리하게 작용하고 있었다.

당시 전당포에 글렌 포드가 맡긴 물품이 도난된 것 중 하나였고 글렌 포드는 당시 피해자를 잘아는 용의자였고 범행 검증 결과 범인은 왼손잡이라는 추정이 있었는데 글렌 포드는 왼손잡이었다. 그리고 그는 흑인이었다. 그에게는 마약 전력이 있었고 그를 목격했다는 증인까지 있었다.

글렌 포드는 억울하게 자신에게 돌아온 화살에 당연히 무죄라고 결백하다고 맞섰다. 그는 그가 맡긴 도난품에 대해 자신은 도난품인지도 몰랐고 다른 용의자가 선의 제공한 것인 줄로만 알고 있었다고 했다. 글렌 포드를 목격했다고 한 증인도 다른 용의자의 여자친구였다. 그러나 경찰은 이미 심증만으로 그의 유죄를 확신했다. 그래서 결국 그는 84125일 다른 용의자들과 함께 1급살인 혐의로 기소되었다. 법원은 2개월 뒤에 그에게 사형을 선고했고 나머지 용의자들에게는 무죄를 선고했다.

 

그렇게 그는 억울하게 옥살이를 시작했고 그의 고난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에게 죄가 있었다면 단지 어떤 물건인지도 모르고 친구들에게 도난품을 받았다는 것 밖에는 없었다. 그는 사형수로 수감되어 루이지애나주 중죄인 교도소인 앙골라 교도소의 0.8평 독방에서 수감 생활을 했다. 그러나 2012년 카도 패리시 지방검사 데일 폭스는 다른 살인사건을 조사하던 중 정보원으로부터 포드가 수감되었던 살인사건의 주범이 용의자 가운데 풀려났던 세 명 중 두 명이라는 진술을 듣고 재수사를 하여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이는 무고했던 포드를 진범을 대신하여 잡아넣었던 검찰의 과실을 자백한 것이었고 그들의 잘못된 판단으로 진범들이 다른 범죄까지 저지르게 만들었다는 것을 시인했던 것이다. 당시 재심을 통해 2014311일 연방법원은 원심 판결을 무효화 시켰고 포드는 그날 바로 석방되었다.

그리고 그에게 불행은 다시 한번 닥쳐왔었는데 그가 석방된지 2달 뒤에 폐암말기 진단을 받고 시한부 선고를 받게 된다. 그가 석방되기까지 걸린 기간은 억울한 죄를 뒤집어쓰고 구속된 지 293개월 5일만이었다. 그의 나이 35세에 억울하게 감옥에 들어가 64세에 무죄를 선고 받고 석방된 그에게는 교도소에서 지급받은 교통비 20달러짜리 직불카드와 교도소 노역 통장에 들어있던 4센트 밖에 없었다.

 

그를 감옥으로 들어가게 만들었던 당시 수석검사 마티 스트라우드는 20154월 포드를 찾아가 머리 숙여 사죄를 하였다. 포드는 스트라우드에게 자신의 시한부인생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덧붙여 "나는 당신을 용서할 수 없다. 정말 못하겠다. 정말. 미안하다." 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마티 스트라우드는 어느 신문의 사설에서 "나는 오만했고 심판하는 일을 좋아했으며 정의 자체보다 이기는 것에 더 몰두했다""글렌 포드와 그의 가족에게 사죄한다"고 썼다. 응보적 정의가 낳은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응보적 정의가 낳은 비극 2

 

 

유영철 연쇄살인사건의 최대 피해자 중의 한 사람이었던 고정원씨의 사례는 우리 사회의 응보적 정의가 가진 한계점과 피해회복이 피해자 개인의 몫으로만 남겨지고 있는 안타까움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한 신문의 기사를 살펴보면서 고정원씨의 이야기를 통해 응보적 접근만이 정의의 최선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죽어서도 이 고통 쉽게 끝나겠습니까

 

유영철에게 어머니, 아내, 아들 한꺼번에 잃은 고정원 씨 세월 갈수록 더하는 그리움

 

고정원(71·사진) 씨는 2003109일을 잊지 못한다. 그의 팔순 노모와 아내, 그리고 4대 독자 아들이 이날 살인범 유영철의 손에 몰살당했다. 세상에 대한 적개심에 사로잡혀 있던 유영철이 쇠망치를 들고 다니며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살해하던 때였다. 서울 종로구 구기동에 있던 고씨의 자택은 한적하고 고급스럽게 보인다는 이유로 범행 표적이 됐다. 고씨는 이날 퇴근 후 현관문을 열었을 때 눈앞에 펼쳐졌던 광경을 아직 잊지 못한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이 가장 참혹한 모습으로 쓰러져 있었다. 가족을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감과 그럼에도 다시 만나고 싶은 그리움은 지난 10년간 끝없이 그를 괴롭혔다. 폭음과 통곡으로 망가진 몸은 10월만 되면 더욱 열이 올랐다.

 

당시 고씨는 건물 경비원으로 일하느라 집을 비운 상태였다. 젊은 시절 컴퓨터 관련 사업을 했던 고씨는 외환위기 무렵 회사를 정리했다. 이후 찾은 일이 경비원이었다. 새벽부터 밤까지 방석 세 개 놓으면 꽉 차는 공간에서 노동하며 돈을 벌었다. 서울 구기동 집은 1984년 사업이 잘되던 시절 지은 것이다. 커다란 가족사진 옆에는 그가 평생의 꿈을 담아 지은 이 양옥의 모습을 담은 사진도 한 장 놓여 있었다.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신문을 돌리며 생계를 꾸렸던 고씨는 좋은 집을 볼 때마다 언젠가 나도 성공해 저런 집을 짓고 살아야지마음먹곤 했다고 한다. 특히 나지막한 담장으로 벽을 두른 모습이 그렇게 좋아 보였다고 했다. 마침내 집을 지을 수 있게 됐을 때 그는 설계부터 벽돌 한 장까지 일일이 신경 썼다. 담장 높이는 1m 20cm로 했다. 그런데 바로 그 담을 넘어 유영철이 집에 들어왔다.

 

이야기는 자연스레 1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고씨는 그날도 평소처럼 새벽 4시에 일어나 출근을 준비했다고 했다. 아내는 가계부를 정리하다 오늘이 적금 만기 날이네요. 이따 저녁때 내가 용돈 줄게요라며 활짝 웃었다. 고씨가 일을 마친 뒤 저녁 6시 반쯤 동네 한의원 앞에서 만나기로 했다. 아내와의 마지막 인사는 몸조심해였다.

 

믿기 힘든, 눈앞에 펼쳐진 지옥

 

이후 아내는 온종일 전화를 받지 않았다. 약속 장소에서 한참을 기다려도 오지 않았다. 불안한 마음에 달려간 집은 조용했다.

 

그 시간이면 저 온다고 어머니랑 아내가 저녁 준비하느라 분주할 때예요. 그런데 불 하나 켜진 게 없었어요.”

 

초인종을 눌러도 기척이 없어 그는 담을 뛰어넘었다. 현관문을 여니 아내가 벽난로 앞에 웅크리고 있었다. “여보하고 몸을 만지자 섬뜩한 차가움이 느껴졌다. 그제야 비로소 피비린내가 훅 끼쳤다. 아내는 머리를 뭐로 맞았는지, 두개골이 다 깨진 상태였다. 2층에서 들리는 라디오 소리를 따라 정신없이 계단을 올라가자 이번엔 아들이 보였다.

 

이놈이 얼마나 힘이 센지, 얼마나 힘껏 내리쳤는지, 우리 아들이, 걔 눈이.”

 

고씨는 말을 잇지 못했다. 간신히 목소리를 짜내 안구가 밖으로 다 쏟아져 나와 있었다고 했다. 욕실 앞에 쓰러진 어머니 역시 머리를 둔기로 맞아 절명한 모습이었다. 꿈인지 생시인지,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가늠조차 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는 112에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경찰이 왔다.

 

그 뒤로 집에 들어갈 수 없었어요. 경찰차에 갇혀 있다가 조사를 받았고, 다음 날 시신이 국립과학수사연구소로 옮겨졌다는 얘기를 들었죠.”

 

당시 유영철은 이미 서울 신사동 주택에 침입해 쇠망치로 집주인들을 내리치는 범행을 저지른 뒤였다. 경찰은 동일범 소행으로 보고 수사에 나섰지만, 범인을 잡지는 못했다. 한동안 고씨는 그놈을 내 손으로 찾아 죽여버리고 싶다는 분노와 나 또한 언제 살해당할지 모른다는 공포에 시달렸다. 한숨도 자지 못했고, 가만히 있어도 몸이 덜덜 떨렸다. 대낮에도 집 밖에 나가지 못했다.

 

대체 누가 왜 이런 일을 저지른 건지 알 수 없으니 더 무서웠어요. 살면서 원한 살 일을 한 적 있나 아무리 곱씹어봐도 모르겠는데 대체 왜 이런 일이 생긴 걸까. 공포에 떨다 또 한순간 분노가 치밀었죠. 그놈 잡히기만 하면 내 손으로 죽이고 나도 우리 가족 따라가겠다는 마음으로 버텼어요.”

 

그러면서도 매순간 가족이 그리웠다.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의 무게에 숨이 막혔다. 평생 함께 살리라 마음먹었던 집에 혼자 다시 들어갈 자신이 없어 헐값에 집도 팔았다. 경기도 과천에 사는 딸에게 몸을 의탁했다. 그때 그의 눈에 성당이 보였다. 아내가 생전에 언젠가는 같이 성당에 다니자고 하던 게 기억났다. 용기를 내 문을 열고 나서자, 신기하게 성당 가는 길만은 두렵지 않았다.

 

이후 힘들 때마다 성당을 찾았다. 집에서도 성경을 필사했다. 신약을 세 번 쓰고, 신약과 구약을 각각 한 번씩 또 썼다. 그렇게 대학노트 20권을 가득 채울 무렵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일주일쯤 지난 20047월 범인이 잡혔다는 소식을 들었다. 유영철이었다. 언론에 온통 그에 대한 뉴스가 쏟아졌다. 어머니, 아내, 아들뿐 아니라 무고한 다른 사람들도 그의 손에 희생당했다는 걸 알게 됐다. 유영철은 당시 26명을 살해했다고 주장했고, 수사 결과 21명을 살해하고 이 중 11명의 시신을 훼손 암매장한 혐의 등으로 구속 기소됐다.

 

다시 몸이 떨렸어요. 이름조차 들어본 적 없는 누군가가 내게 이토록 큰 고통을 안겨줬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죠. 더는 못 살겠다, 다 끝내자 생각했을 때 유영철에게도 자식이 있다는 걸 알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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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원씨는 유영철을 생각하면 치가 떨릴 정도였지만 그를 용서하는 것이 자신이 살 길임을 알았다. 그리고 사형만은 면하게 해달라는 탄원까지 냈고, 정기적으로 유영철에게 영치금을 보내고 있다.

 

고정원씨가 바라는 건 유영철이 마음을 고쳐먹고 자기 잘못을 뉘우치는 것이다. 그리고 국가와 사회는 그런 범죄자가 생기게 한 책임이 일정 부분 있음을 인정하고, 그들의 목숨을 빼앗는 대신 교정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또 범죄와 처벌이라는 사법 체계 바깥에서 홀로 몸부림치는 자신과 같은 피해자 가족들의 고통을 줄여주려는 노력도 하기를 바란다고 했다.

 

이처럼 응보적 정의는 범죄의 피해를 가해자의 처벌로만 종결하고 있다. 그것이 커다란 범죄이든 경범죄이든 상관없이 사건의 종결이 있고나면 피해자의 피해는 그 자신의 몫이 되고 만다. 응보적 정의의 한계는 너무나 우리 사회의 면면에서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7. 응보적 정의에 대한 새로운 도전과 성찰

 

처벌이 가중되면 범죄율과 재범률이 감소하여 사회공동체가 더 안전해 지는가?

* 단적인 예로 미국의 사형제가 있는 주와 사형제가 시행되지 않는 주의 살인범죄 통계에 따르면 사형제도가 있는 주의 살인범죄 비율이 심지어 더 높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엄벌주의로만은 정의를 세울 수 없다는 것, 벌주의로 사회공동체가 더 안전해 질 수 없다는 것의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8. 응보적 정의를 기반한 생활지도의 새로운 도전들

 

피해자가 입은 피해와 어려움은 온전하게 회복되고 있는가?

모든 당사자라고 할 수 있는 교사, 학생 또래집단, 학부모 그룹의 어려움들은 해결되고 있는가?

사건이 재발되지 않도록 원인 자체가 해소되고 있는가?

잘못한 당사자들은 잘못을 깨닫고 반성하고 있는가?

처벌 외에 당사자들은 잘못을 바로 잡기 위해 책임을 지고 있는가?

잘못에 따른 교육 공동체 구성원들 간의 갈등은 해결되는 쪽으로 가고 있는가?

안전보장과 재발 방지는 효과적으로 이뤄지고 있는가?

학교 밖의 법적 절차에 따른 과도한 비용과 절차는 어떻게 할 것인가?

 

 

<참고문헌>

회복적 생활교육 학급운영 가이드북. 정 진, 피스빌딩,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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